Tuesday, February 17, 2004

우리 할마이한테 갈라꼬 땄지

글/사진: 이진우

7년 전,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신문을 보다가 문득 눈길 머문 곳은 아흔두(92) 살 난 할아버지가 운전면허를 땄다는 놀라운 기사였습니다. 그리고 그이는 운전면허제도가 시행된 이래 나라 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운전면허 취득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몇 줄 되지 않는 기사였지만 그것을 읽고 난 다음에 궁금증이 발동해 달싹거리는 엉덩이를 주체하지 못하고 다음날 그이를 만나러 왜관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다다른 집, 그이는 달랑 혼자였습니다. 살림은 옹색해 보이지 않았지만 혼자라는 것이 집안 가득 묻어 있는 그런, 쓸쓸한 분위기였습니다.

찬바람을 무시하기에는 모진 날씨임에도 그저 창으로 비껴드는 햇볕으로만 데울뿐, 군불 따위는 넣지 않은 채 이부자리가 함부로 널려 있던 방에 앉아 그이에게 물었습니다. "할매는요?" "누구, 우리 할마이? 저 안 갔나." "어데요?" "저 멀리 갔다 말이라. 두어 해 안 됐나." "그래, 집이 이렇구나, 그라마 할배가 혼차 밥하고 빨래하고 다 하는기요?" "그라마 내가 혼차 하지, 어데 누가 해줄 사람이 있나."

그이는 할머니 살았을 적에 나들이를 다니면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사이였다고 했습니다. 잠깐 읍내 장에 갈 때도 반드시 할머니와 같이 다녔고 거기에다가 행여 놓칠세라 두 분이 손까지 꼭 잡고 다녔다고 하니 듣던 중 처음인 소리였습니다. 대게 나이 드신 분들은 사진이라도 같이 찍자고 하면 저어하며 못내 멀찍하게 서는 것이 보통이건만 그이는 언제나 동행이었다고 하니 별일이다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이가 "우리 할마이 한번 볼래?" 하며 안주머니에서 꺼내든 지갑 속에는 놀랍게도 연인들이 사진을 넣고 다니듯 할머니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할매가 그래 좋습니꺼?" "좋고 말고, 우리 할마이만한 사람이 어데있나, 내 살면서 그런 사람 우리 할마이 말고 두 번도 보고 못 했구마." "그란데 가리 늦게 운전면허는 무 할라꼬 땄는데예?" "그거야 우리 할마이한테 갈라꼬 땄지." "할머니가 어데 계시는데예?" "할마이 있는 산이 여서 멀어. 버스 타고 댕기마 하루에 다 못 갔다 오고, 택시 타고 가마 돈 감당이 안 되고, 몇 번 가보이 당최 돈이 남아나질 안하는 걸 우짜노. 여서 택시 타고도 한 시간이나 가야 된다 말이라. 그래 고마 내가 운전해가 댕기마 속 편하이 댕길 수 있겠다 이래가 면허를 딴 기지."

그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제 마음속에는 뭉클뭉클 뭉게구름처럼 무엇인가가 속구치고 있었습니다. "그래 차는 샀습니꺼?" "어데, 아이 몬 샀다. 제우 면허만 따놓고 이래 있는 기지. 차도 오토라 카는 기 있다 카데. 오토라 카는 거 그거 사야 핀하다 카는데. 이래저래 생각만 하고 있는 기라. 여 집 앞에 길 공사 다 끝나고 이라마 인자 사야지. 겨울게는 눈도 오고 위험하다꼬 날 풀리마 사라 케서 기다리고 있는데 명년 봄에는 내가 운전해가 할마이한테 가야지."

그이가 90세가 되어 시작한 면허 따기는 92세가 되어서야 끝이 났습니다. 2년 반 동안, 면허 시험장 다니는 일도 여간 아니었을 성 싶은데 이제는 자동차를 사서 할머니 묘에 매일같이 다니겠다는 다부진 꿈을 꾸는 그이 앞에, 초라하지 않을 사랑 그리 많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읍내 장터에 가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물어 봤습니다. 전에 할머니 손 꼭 잡고 장 보러 오던 할아버지 본 적 있느냐고 말입니다. 말 꺼내기가 무섭게 "하이고, 그 영감쟁이, 닭살시러버라. 우린 다 알제, 그 영감이 백 살이 다 된 영감이라. 그란데 우째 그래 나이 들어가도 그래 댕기는지 모르겠데. 우리 같으마 돈 주고 그래 하라 케도 못 하겠더마, 그 영감은 맨날 그래 댕긴다 말이라. 이 장에 그 영감쟁이 모리는 사람 없을 끼라. 그란데 그 할마이 죽었다 카던데.. 봐라, 그 할마씨 죽었다 카제 그자?"

불현듯 그 할아버지 생각이 솟구친 것은 얼마 전 친한 후배가 부부 사이에 갈등이 심하다며 찾아왔던 탓입니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던 탓입니다. 부부의 인연을 맺고 끊는 것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것은 아닌지..

* OZ204/17FEB 기내에서 읽은 뭉클한 짧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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